2012년 9월 7일 금요일

특별한 이유 없이 숨찰 때 한번 생각해 볼 질환, 폐동맥고혈압


가천의대길병원 심장내과 정욱진 교수

모든 형벌 중에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서서히 숨을 막히게 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황현의 ‘매천야록’이라는 책을 보면 엄격한 가정의 윤리 도덕을 지키지 않았을 때 아비가 눈물을 머금고 그 자식에게 비밀리에 내렸던 도모지(塗貌紙)라는 사형(私刑)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자식을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고, 물을 묻힌 창호지를 얼굴에 몇 겹이고 착착 발라 놓으면, 말도 못하는 상태에서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서서히 숨조차 쉬지 못하게 되어 죽게 하는 끔찍한 형벌이다. 도무지라는 부사는 바로 이런 도모지→도무지에서 유래하여, 전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는 의미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질병 중에도 이런 ‘도모지’와 같은 형벌처럼 숨이 서서히 차서 죽음에 이르는 병들이 있다. 심장의 기능이 떨어져서 몸에 충분한 산소와 영양분을 공급하지 못해서 생기는 심부전증, 폐의 기능이 떨어져 서서히 숨이 차는 만성폐쇄성 폐질환, 때로 갑작스럽게 숨찬 증상을 일으키는 기관지 천식이나 폐색전증 등이 있다. 그리고 이런 명확한 심장질환이나 폐질환이 없으면서 숨찬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서 꼭 의심해봐야 하는 흔치 않은 병으로 ‘폐동맥 고혈압’이라는 병이 있다.

일반적으로 고혈압이라고 하면 전신순환계, 즉 심장에서 대동맥을 통해 내보낸 피를 다시 대정맥을 통해 받게 되는 순환계의 혈관 내 압력이 높은 것을 일컫는다. 한편, 폐동맥고혈압은 폐순환계 즉, 심장이 전신에서 가스 교환을 위해 받은 피를 폐로 내보내는 혈관인 폐동맥의 평균 혈압이 25mmHg 이상, 수축기압은 일반적으로 40mmHg 이상 지속되는 것으로 정의되는 질환이다. 이 병은 특히 계속 혈관의 수축, 증식과 막힘이 반복되는 진행성 질환으로, 뒤늦게 진단될 경우 치명적인 질환이다.

최근 프랑스의 폐동맥고혈압 국가등록사업에 의하면, 폐동맥고혈압의 유병률은 성인 백만 명당 15명, 연간 발병률은 성인 백만 명당 2.4명으로 추정되었다. 이들 중 다수(39.2%)는 다른 원인이 없는 ‘특발성 폐동맥고혈압’이었으며, 진단 당시 이미 증상이 아주 심해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정도인 WHO/NYHA 3기나 4기 이었다. 다른 원인으로는 폐동맥고혈압은 경피증 등 결체조직 질환(15.3%), 선천성 심장병(11.3%), 간장질환으로 오는 문맥고혈압(10.4%), 일부 식욕억제제의 복용(9.5%), 그리고 에이즈 (6.2%)와도 관련이 있다.

불행하게도 폐동맥고혈압은 아직 완치법이 없다. 그렇지만, 불행 중 다행인 것은 그 치료법이 현재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폐동맥고혈압의 치료법이 없던 1992년 이전에는 평균 생존기간은 진단 후 24개월, 즉 2년에 불과하였고, 진단 후 5년 뒤 생존율도 34%였다. 그런데, 2000년 이후 5년 생존율이 68% 이상으로 두 배 가까이 향상되었다. 이러한 생존율의 개선은 새로운 약물이 소개되고, 질병 관리체계가 개선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기 치료가 중요한데, 그 이유는 일상생활이 가능한 WHO/NYHA 기능분류 1기와 2기에 치료를 시작한 환자들은 3기 또는 4기에 시작한 환자보다 생존기간이 의미 있게 더 긴 것으로 보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폐동맥고혈압을 조기에, 공격적으로 치료하는 것은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많다. 치료를 늦추게 되면 기능의 장애와 사망의 위험이 높아진다. 치료가 늦어지면 절반 이상의 환자에서 심각한 장애를 가져 오겠지만, 조기에 치료할 경우에는 기능적 호전을 보일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아질 것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조기에 치료를 하게 되면, 비록 초기 치료의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다시 또 치료를 시도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치료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 치료방법을 변경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치료반응을 주의 깊게 감시하는 등 환자에 따른 개별화된 치료계획을 수립하는 것도 중요하다.

환자를 조기에 치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환자를 선별해야 할까? 보다 간단한 선별검사법, 이 질환에 대한 의사들과 환자들의 인지도의 증가, 진료과 간의 효과적인 협력과 고위험군 환자의 선별검사 프로그램 등이 있다.

최근에는 심장의 구조와 기능을 쉽고 정확하게 알려주는 심초음파 검사가 선별검사와 치료 후 반응을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심장내과, 호흡기 내과, 심장소아과, 류마티스내과 사이의 긴밀한 협조도 매우 중요하다. 가천의대길병원에서는 이러한 4개과의 유기적인 협조로 폐동맥고혈압 클리닉을 운영 중에 있고, 현재 20여명의 환자들이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

전문가들은 폐동맥고혈압 환자의 예후를 보다 개선시킬 수 있는 요소들을 다음과 같이 일곱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즉, 
1. 임상 연구 데이터를 늘리는 것, 
2. 임상 평가기준을 명확히 하는 것, 
3. 새로운 치료법을 도입하는 것, 
4. 증거에 기반한 치료 지침을 활용하는 것, 
5. 새로운 선별검사 프로그램을 찾아내는 것, 
6. 진료과들 사이에 더 많이 협력 하는 것과 
7. 환우회, 질병등록사업 및 진료협력센터 (referral center) 지정을 통해 폐동맥고혈압에 대한 인지도를 향상시키는 것 등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올해부터 폐동맥고혈압 국가등록사업을 시작하게 되어 관심이 높아지는 상황이다. 폐동맥고혈압의 조기발견과 조기치료가 질환의 예후를 개선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고위험군 환자에 대한 폐동맥고혈압 선별검사가 조기 진단을 개선시킬 수 있다. 더 중요한 한 가지는 이 질환에 대한 의사들과 환자들의 인식의 문제이다. 암에서와 마찬가지로 비록 완치는 안되지만 빨리 발견할수록 보다 건강하고 오랜 삶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모지’를 기억하다면, (심폐질환이 없이) 이유 없이 숨차올 때는 폐동맥고혈압을 한번쯤 의심해봐서 심초음파 검사 등의 선별검사를 받아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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